Snu Roman. [69422] · MS 2004 · 쪽지

2020-10-05 17: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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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앉고 싶은 문과생들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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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ing beats speed, precision beats power"

"타이밍은 스피드를 압도하고 정확도는 힘을 제압한다"


당시 도전자 코너 맥그리거가 UFC 타이틀 전에서 당시 챔피언 조제알도를 이기고 한 말이다.


아름다운 말이다. 


스피드와 힘은 타고나는 것인데 알도처럼 핸드스피드와 무지막지한 힘 없이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저 말은 코너에게만 쉬운 말이다. 코너처럼 페더급 전체에서 가장 긴 리치를 갖고 있고

전형적인 카운터형 복서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저 말은 권아솔 같은 국내 파이터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난 살면서 많은 것을 이뤘던 것 같다. 보잘 것 없지만 대학 시절,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그런 건 감췄다. 드러내봐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마음아파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 것 같은가. 대부분은 동정, 안쓰러움이다. 1등이 10000등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10000등이 뭐 어때. 다 잘 될 거야"는 솔직히 말해 기만이다. 저런 위로는 날 더 괴롭게 했다. 


아픔을 드러내는 게 유행인 적이 있었다. 아파요. 같이 울어주세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수능 점수가 안 나왔어요.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한 번 더 일어서면 된단다. 아무도 너를 비웃지 않을 거란다. 그 누구도 지금의 결과로 너를 무시하지 않을 거란다. 학벌따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내가 10여년 전 수능을 망치고 하루하루를 숨만 쉬며 살아갈 때, 내게 위로를 건넸던 많은 어른, 문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런 말 하는 사람들은 죄다 고학력, 고스펙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청춘은 아파도 된다던 그 분은 서울대 교수였고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던 승려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미국인이다. 


오히려 학벌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이는 학벌의 벽을 극복했던 자들이다. 전문대를 졸업한 배달의민족 CEO가 명문대에 관해 어떻게 평가했는지 들어보라. 아픈 게 씻겨버리고 싶은 쓰레기같은 기억으로 남을지 청춘으로 추억될 수 있는지는 현재의 자기 처지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활약하며 바쁘게 살던 이에게 휴식은 꽤 많은 것을 주지만 원래 멈춰있던 자가 또 멈춰봐야 무엇이 보이겠는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역시나 되는 일이 없었다. 익숙지 않은 외국어로 의사표현하기도 바쁜데 현지인끼리의 날선 디베이트에 외국인인 내가 쉽게 끼어들기 어려웠고 학부시절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내가 교수의 질문을 받을까 떨었다. 이 친구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도 시인 나르테스크의 구절을 봤다.


"고생했으니 이제 쉬어라. 모두가 너를 비웃을 것이다." 


이 말은 나의 많은 걸 바꿨다.


저마다 힘든 사정이 있는 이들에게 많은 위로가, 또 그보다 많은 질타와 동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만 기억하자. 고생했으니 주저앉아도 된다(세련된 문체로 쉬어도 된다)는 말은 모두가 너를 비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 생략됐다.


알아두자. 쉬어도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탓해도 된다. 


그것 때문이니. 


다만, 모두가 너를 비웃을 것이다. 

그게 싫다면 무얼 해야 할지 역시 당신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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